이승연 작품론 "우주적 시간과 찰나의 시간"
평론: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유은순  
지원: 마산 삼진미술관 아트 레지던시 (2021.6-11)
이승연은 일상적인 삶에서 불현듯 마주하게 되는 신비하고 몽환적인 감각을 회화로 재현한다. 경비실, 실기실 복도, 산책로 등 반복적으로 굴러가는 삶에서도 새롭게 감각하는 지점들을 포착한다. 이는 주로 공기의 분위기와 비일상적인 빛의 색채로 표현된다.

​​​​​​​《Red light #3》(2011)

《Red light #3》(2011)는 거주하고 있던 아파트 입구에 있는 관리사무소를 그린 작품이다. 너무 익숙해서 눈에 들어오지 않던 공간이 한순간 낯설게 느껴진 찰나를 주관적으로 해석하였다. 작가는 관리사무소의 건축적인 외형은 하얗게 날려버리고, 밤의 검은 공기와 붉게 빛나는 빛을 부각한다. 건물이 서 있는 장소는 작가가 늘 다니던 길목이 아닌 상상 속의 어느 들판이다. 주체가 딛고 있는 공간은 지금 여기가 아닌 시공을 초월한 상상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Going somewhere #1>(2011)

<Red light #2>(2011)

작가가 일상적으로 다니던 거리를 재현한 <Going somewhere #1>(2011)이나 작업실 복도를 그린 <Red light #2>(2011)에는 풍경과 함께 사람을 재현한다. 이 시기에 재현된 인물은 몽환적으로 변화시킨 풍경 속에 녹아들어 있다. 전자에서는 우주의 어느 공간이 인물로 침투한 듯 재현되고 후자에서는 공간이 이(異)세계로 변모하는 순간 인물도 함께 그 공간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품에서 인물들은 개별적인 개성을 드러내기보다 풍경의 구성요소 중 하나로 작동한다.

The Moon#2, 60.6 x 60.6 cm, watercolor on paper, 2018

The Star#1, 60.6 x 60.6 cm, watercolor on paper, 2018

작가가 풍경에서 발견하는 신비한 감각의 근원은 최근의 작업에서 구체화된다. 작가는 2018년 ‘달’을 주제로 한 회화 연작을 그린 바 있다. 작가는 매일 밤 보는 달이 45억 년 전 지구와 함께 탄생하였다는 사실이 무척 인상 깊었다고 한다. 인간은 너무도 방대한 지구 중에서도 아주 얇은 지표면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보고 경험하며 살아간다. 지상에서 인간은 욕망을 실현하며 무언가를 건설하고 파괴한다. 인간은 그곳에서 끊임없이 아둥바둥 살아가지만 문득 고개를 들어 올리면 인간은 자신이 서 있는 그 토대와 동일한 역사를 가진, 인간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큰 시간의 역사를 가진 달과 마주한다. 우주적인 광활함에서 인간은 자신의 유한함을 느낀다. 우리는 여전히 작고 나약한 존재일 따름이다. 요컨대 작가가 느낀 신비한 감각의 기원은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 사이의 간극에서 온다.

<Series of Human 1>(2020)

작가는 우주적 시간에 대비되는 인간의 유한함을 <Series of Human 1>(2020)로 그린 바 있다. 이 작품은 4개의 연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에서 뚜렷한 경계를 지닌 사람의 형상이 점차 경계가 흐려지다가 네 번째에 이르러 경계가 완전히 사라지고 물처럼 변화한다. 개개별의 인간은 일시적으로 존재하지만, 우주라는 거대한 체계에 속해 있기도 하다. 작가는 인간의 생성·변화·소멸하는 과정을 담아낸 작업을 통해 유한함이 종국에는 무한과 이어져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찰나의 시간은 우주적 시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놀이터의 달>(2019/2021)

<400살 푸조 나무 밑에서 노는 아이들과 할머니>(2021)

  이승연의 최근 작업에서 인간이 감각하기에 너무도 큰 시간이어서 무한하게 느껴지는 시간과 그에 대비되는 찰나의 시간이 한 화면에 함께 재현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전자는 달로 형상화된다면 후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함으로 대변된다. <놀이터의 달>(2019/2021)은 미끄럼틀 위에 서 있거나 걸터앉아 있는 세 명의 아이들이 거대하고 붉은빛을 띤 거대한 달을 보고 있는 작품이다. 놀이터의 놀이기구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와 그 뒤로 보이는 달은 영원함과 순간성을 극적으로 대비시키는 한편, 놀이기구의 기하학적인 인공성과 달의 자연성을 대비시킨다. 나아가 작가는 자연적 생명체에서 달에서 보았던 무한에 가까운 시간을 발견한다. <푸조 나무 밑에서 노는 아이들과 할머니>(2021)에서 푸조 나무의 잎에 달의 거대한 형상을 새겨 넣는다. 작가는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어린아이와 노인을 대비시킴으로써 삶의 유한함을 부각한다.
 
이승연은 2019년부터 디지털 페인팅을 진행하고 있다. 디지털 페인팅의 건조함을 보완하기 위해 수채화의 물감의 번짐이나 붓질의 텍스처를 사진으로 촬영하여 회화적 요소를 가미한다. 디지털 페인팅은 사진과 마찬가지로 스케일을 달리하여 출력할 수 있고 복제할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모티프들을 재조합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들 수 있다. 회화의 복제불가능성에서 기인하는 가치는 디지털 페인팅에서는 상대적으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디지털 페인팅은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가치를 가진다. 이러한 매체적 특성은 우주적인 무한함과 영원성에 대비되는 찰나적인 아름다움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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